맨위로가기

이간 (1527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간은 1527년에 태어나 1598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효령대군의 6대손으로,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전설사별제, 북평관별제 등을 거쳐 포천 현감, 김화 현감, 정읍 현감, 회덕 현감, 경산 현령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시 온양 군수로 재직하며 백성을 보호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에 위치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27년 출생 - 펠리페 2세
    펠리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 이탈리아, 아메리카 등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아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며 종교 개혁 세력을 탄압하다가 1598년에 사망했다.
  • 1527년 출생 - 야규 무네요시
    야규 무네요시는 신카게류 검술의 대가이자 야규 가문의 중흥조로, 무투도리라는 독자적인 무술을 개발하고 야규가헌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와의 인연으로 야규 가문이 재건되는 데 기여하며 일본 검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598년 사망 - 성혼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 1598년 사망 - 이여송
    이여송은 조선 출신 이주민 후손으로 명나라 장군이 되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으나 소극적인 태도와 횡포에 대한 비판도 있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 조선 태종 - 길재
    길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삼은 중 한 명이며 성리학적 학문을 실천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조선 건국 후 관직을 거절하며 사림파 학통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야은집』 저술 및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 조선 태종 - 심종
    심종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청원군에 봉해지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회안군 이방간과 내통한 죄로 폐서인되어 사망했다.
이간 (152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간
한자李幹
자(字)간지(幹之)
출생일1527년 3월 6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
사망일1598년 3월 3일
사망지조선 황해도 봉산군 봉산읍
사망 원인병사
국적조선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배우자부인 경주김씨, 부인 인동장씨
자녀아들 이경록, 아들 이경복, 이들 이경유, 아들 이경기
부모아버지 이광윤, 어머니 경주이씨
친척사위 박승황, 할아버지 파성군 이철동, 손자 이서, 손자 이탁, 손녀사위 이경항, 서손자 이기축
경력
직업무신, 군인, 정치인

2. 생애

이간은 1527년 3월 6일 경기도 의정부에서 효령대군의 6대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광윤이고, 어머니는 군수 권자선의 딸인 증 정부인 안동권씨이다. 생모는 경주 이씨사옹원직장을 지낸 이하신(李夏臣)의 딸이다.[1] 10세 전후해 부모와 할아버지를 모두 잃고 할머니에게서 양육되었다.[1]

1560년(명종 15) 음직으로 전설사별제가 되고, 1561년 북평관별제, 1563년(명종 18) 금화시별제를 지냈다.[1] 1565년(명종 20년) 내섬시직장, 1567년(명종 22년) 사재감주부와 사헌부 감찰을 거쳐 포천현감으로 나갔다. 1568년(선조 2년) 김화현감으로 부임했다가 9개월 만에 질병으로 사직하고, 1570년(선조 3) 정읍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575년(선조 8) 회덕현감, 1582년(선조 15) 경산현령을 거쳐 풍덕군수가 되었다가, 1588년(선조 21년) 온양군수로 발령되었다.[1]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에게 병기와 군량을 나누어 주었다.[1] 선조한성부를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관아의 관리들도 도망치는 상황에서도, "나는 봉강(封疆)에서 주는 것만 알 뿐 다른 일은 알지 못한다."하며 의연히 고을을 지켰다.[1]

1594년(선조 27년) 사복시첨정, 1595년 전설사수, 행통례원상례 등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년) 아들 이경록의 공로로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여 오위장으로 제수되었다. 이어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1] 1598년(선조 31) 의흥위부호군 겸 오위장에 제수되었다.[1] 그는 두 번 사직을 청하여 허락받고, 아들 이경유의 임지가 있는 황해도 봉산군으로 갔다. 1598년(선조 31) 전란이 끝나자 그해 3월 3일 황해도 봉산군 봉산읍에서 사망했다.[1]

2. 1. 출생과 가계

이간은 1527년 3월 6일 경기도 의정부에서 태어났으며 효령대군의 6대손이다. 할아버지는 파성군 이철동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과 풍덕군수를 지내고 사후 증 형조판서에 추증이광윤이다. 어머니 증 정부인 안동권씨는 군수 권자선의 딸이고, 생모는 경주 이씨사옹원직장을 지낸 이하신(李夏臣)의 딸이다.

고조부는 의성군 이채이고, 증조부는 운림도정 이핍이며, 할아버지 파성정 이철동은 왕족으로서의 예가 끝났다. 파성정은 서자였지만 파성부정에 제수되었다가 파성정에 이르렀고, 노인직으로 정의대부 파성군에 올랐다. 아버지 이광윤은 음직으로 관직에 올라 사직서령, 돈녕부도정, 풍덕군수 등을 지내고 사후 여러번 증직되어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과 증 자헌대부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고모 중 한명은 중종대의 훈신 김극핍에게 시집갔다.

운림도정 이핍의 묘소는 포천군에 조성되었는데, 아버지 이광윤이 자신의 외가 근처에 정착하고 묘소를 양주군 별비면 고산리에 조성하면서 그의 후손들은 현재의 의정부시 고산동 지역에 살게 되었다.

10세 전후해 부모와 할아버지 모두 사망하고 할머니에게 양육되었는데, 월정 윤근수가 쓴 묘갈문에 의하면 10세가 안되어 부모를 모두 잃고 할머니 손에서 양육되었으며, 어려서부터 기쁘고 슬픈 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첫 부인은 경주김씨로 통정대부 진주목사 김홍의 딸이고, 두번째 부인은 인동 장씨로, 영의정 장순손의 증손이자 사헌부감찰, 연천현감을 지낸 장경량의 딸인데, 두번째 부인 인동장씨는 종증조부 낙안군 이밀의 손자 금양부정 이경의 외손녀였다. 후처 쪽 장모 전주이씨와 그의 아버지 이광윤은 8촌간이 된다.[1]

2. 2. 관료 생활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익혀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으나 낙방하고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1560년(명종 15) 음직으로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 가 되고, 1561년 가을에 북평관별제(北平館別提)를 거쳐 1563년(명종 18)에 금화시별제(禁火侍別提)를 지냈다.

1565년(명종 20년)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1567년(명종 22년)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와 사헌부 감찰을 거쳐 포천현감으로 나갔다. 포천현감 재직 시 명나라 사신이 조선 방문 중 포천에 여러 번 왔는데도 접대하는 절차를 축소, 간단하게 하여 고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다시 1568년(선조 2년) 강원도 김화현감으로 부임했다가 9개월만에 질병으로 사직하고 내려왔다. 1570년(선조 3) 정읍현감(井邑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정읍현감 재직 시 만 5년 동안 선정을 쌓았다. 1575년(선조 8) 충청도관찰사의 추천으로 회덕현감(懷德縣監)으로 부임하여 6년 간 치적을 쌓아 명성을 얻었고, 1582년(선조 15) 경산현령(慶山縣令)으로 영전하였다. 경산현령 재직 중 지방관 근무고과 성적 1등에 올라 표창하는 상으로 옷감을 하사받았다.

그 뒤 풍덕군수가 되었다가, 1588년(선조 21년) 온양군수로 발령되었다. 온양군수로 부임 후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비축하였으므로 이때 백성들이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에게 병기와 군량을 나누어 주자 사람들이 그의 예지력에 감탄했다. 선조의 어가가 한성부를 떠나 의주까지 파천하고 관아의 관리들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한 관리가 울면서 말하기를 "지킬 군병이 없고 왜적은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무엇을 믿고 이 고을에 계십니까?" 하니, "나는 봉강(封疆)에서 주는 것만 알 뿐 다른 일은 알지 못한다."하며 의연히 고을을 지켰다. 그의 의연한 태도에 백성과 관리들 중에 도망가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이를 알고 가상히 여겨 표창을 내리고 내직으로 전임시켰다.

2. 3. 생애 후반

1594년(선조 27년)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고 1595년 전설사수(典設司守), 행통례원상례(行通禮院相禮) 등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년) 아들 이경록의 공로로 특별히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여 오위장(五衛將)으로 제수되었다. 이어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재직 중 백성을 수탈하지 않고 선정을 쌓아 포천, 정읍, 회덕, 경산에 혜정(惠政)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그는 평소에 남의 좋은 일을 들으면 자신이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남의 허물을 들으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남과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1]

1598년(선조 31) 의흥위부호군 겸 오위장에 제수되었다. 그는 두 번 사직을 청하여 허락받고, 아들 이경유(李慶裕)의 임지가 있는 황해도 봉산군으로 갔다. 1598년(선조 31) 전란이 끝나자 그해 3월 3일 황해도 봉산군 봉산읍에서 죽었다. 후일 계곡 장유(張維)가 쓴 이경록의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가 죽자 선조가 연로(沿路)에 명하여 호상(護喪)하게 하였다고 한다.[1]

3. 사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내동면 고산리(현,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2-1) 송산 선영 아래로 운구되어 그해 7월 1일 아버지 이광윤의 묘소 오른쪽 언덕에 매장되었다. 묘소 앞에는 장명등과 동자석물이 세워졌다. 훗날 그의 묘소 아래에는 장남 이경유의 묘소가 들어서고 그 아래에 손자 완원부원군 이서가 들어섰다. 이간의 묘소에는 두 부인이 양옆에 매장되어 봉분 3기가 있다.

그의 묘 근처 남서쪽으로는 바로 왼쪽 아래에 신숙주 후손들의 묘소가 보이며 그 옆에 신숙주의 묘소가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의정부교도소가 있다. 그의 묘소 오른쪽 언덕에는 서손자 이기축의 묘소가 있다. 그의 묘소 서북서 방향에는 할아버지 파성군 이철동의 묘소가 있다.

인근에는 운림도정 이핍의 묘소, 다른 아들 이경유의 묘소, 신숙주 묘소 및 신숙주 후손들의 묘, 정종우 묘 등이 있다.

사후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가 손자 이서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다시 증 의정부 좌찬성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송산리(현,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송산) 선영 아래에 있다. 묘비문은 월정 윤근수(月汀尹根壽)가 썼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고조부이채
증조부운림도정 이핍
할아버지파성군 이철동1453년 ~ 1537년
할머니현부인 초계 변씨1460년 ~ 1537년 이후 10월 10일
고모이씨
고모부김극핍1472 ~ 1531, 광산인, 시호는 정평(靖平)
아버지이광윤1490 ~ 1535
어머니권씨권자선의 딸
생모이씨사옹원직장 이하신의 딸
부인김씨? ~ ?년 11월 21일, 진주목사 김홍의 딸
아들이경록1543년 - 1599년
며느리이씨? ~ ?년 5월 8일, 사헌부 감찰 이학증의 딸
손자이서
손녀이씨
손녀사위유준1584년 - 1661년
아들이경복
부인장씨? ~ ?년 8월 25일, 사헌부감찰 연천현감 장경량의 딸
아들이경유1562년 - 1620년
며느리연일 정씨? ~ ?년 10월 14일, 정희석의 딸, 자녀 없음
며느리죽산 박씨? ~ ?년 10월 6일, 병절교위 박문좌의 딸
손자이정후사 없음, 요절
손녀이씨1600년 - 1667년
손녀사위이경항1601년 - 1643년
첩며느리장흥 고씨? - 1644년, 옥구현감 고언명의 서녀, 고경명의 조카, 고맹영의 서손녀
서손자이기축1589년 10월 7일 ~ 1645년 6월 6일
서손부우씨
서손자이상1604년 - ?
서손녀이씨
서손녀사위송철
아들이경기1564년 - 1583년 8월 29일
며느리남양 홍씨1564년 ~ 1646년 9월 21일, 감찰 홍윤선의 딸
이씨
사위박승황선공감 감역
외조부이하신
외조모청주 한씨한증의 딸


5. 평가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전 출력을 제공해주시면, 지시사항에 맞춰 수정해드리겠습니다.)

6. 기타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전투에 참여한 동명이인으로 괴암 이간(李幹)이 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고 한다.

정조 대의 여항시인 문무자 이옥은 그의 6대손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